날짜: 2023-06-01 조회 수: 72
얼마 전에 장례가 있었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저에게 물으셨습니다.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시고 착하게 사신 분인데, 왜 젊은 나이에 암으로 돌아가셨나요?”
예전에도 똑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시던 분인데, 왜 악한 사람(ex: 마약에 취한 운전자)의 차에 치어 죽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초자연적인 기적을 베푸셔서 사고의 현장 밖으로 그분을 옮기시지 않았나요?”
실제로 초자연적인 것을 경험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이 흔들리는 사람들을 목회하면서 많이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을 초자연적인 일에서 찾으려 합니다
온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이곳 저곳에서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모든 장소에서, 매일, 매순간 초자연적인 일을 경험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은 자연을 만드시지 않고 초자연적인 세상을 만드셨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 맨 첫 장에서부터 “내가 자연과 자연의 섭리를 창조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자연과 자연의 섭리를 창조하신 이유가 ‘무시하시기 위하여’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연과 자연의 섭리를 통하여 자신의 뜻을 드러내시려고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꾸 초자연적인 것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려고 합니다.
성경은 “바로 만물이 하나님이 계신 것에 대한 핑계치 못할 증거이다"(롬 1:20)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하찮은 나비 한 마리 안에 있는 엄청난 생명의 질서가 하나님이 계신 증거이고,
모든 생명이 유지되도록 허공에 떠서 한치의 오차 없이 자전하고 공전하는 지구가 하나님이 계신 증거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자꾸 초자연적인 것에서만 하나님을 발견하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자연을 훨씬 뛰어넘는 분이시고, 얼마든지 원하시면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성경도 여러 곳에서 이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도 초자연적인 사건들이 경험됩니다.
저의 외증조부 할머니의 일입니다. 외증조부 할머니에게 천사가 나타나 세 가지 예언을 해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네 아들이 죽었다가 사흘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정말로 외할아버지는 사망 판정을 받았다가,
사흘 되는 날에 마을 사람들이 관 속에서 인기척을 듣고 다시 외할아버지를 꺼내는 일이 있었습니다.
저의 외할아버지의 일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일을 경험하신 외할아버지가 저에게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잘 믿으랑께. 내가 천국을 봤쓰야. 내가 죽을 때를 천사가 알려줬당께. 내가 죽을 때 일본 동쪽에서 큰 물이 일어나 일본을 덮칠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장수하셨고,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 동일본 대지진으로 큰 쓰나미가 일본을 덮쳤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경험한 일입니다. 큰 사건은 아니지만 저도 초자연적인 일을 경험한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기도를 시작한 후 ‘15~20분이나 기도했나? 아이구, 다리가 저리네’하며 눈을 떴는데 실제 시간은 3시간 반, 어느 때는 4시간이 지나서 깜짝 놀랄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말아야 할 것은 자연과 자연의 섭리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자연과 자연의 섭리를 창조하신 이유는 ‘무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과 자연의 섭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사실입니다.
행복도 초자연적인 것에서 찾으려 합니다
하나님을 발견하는 일만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도 초자연적인 것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족함이 없고, 아프지 않고,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행복을 위해 완벽한 삶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이런 행복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행복은 우리가 천국에서 누릴 행복이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행복을 추구하는 일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지으실 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도록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은 이런 완전한 행복을 본능적으로 소망합니다.
그러나 이런 행복은 우리가 천국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이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한 천국이 아니라 부족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부족한 세상에서 부족한 사람들이 살면서 어떻게 부족함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완전하지 않은 인간이 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어야 행복할까요? 모든 문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을 때 발생합니다.
잘 가다가도 일이 꼬이고 잘 지내다가도 관계가 틀어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 욕구와 감정대로 이루어지길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내 욕구와 감정대로 되면 그 순간은 속이 시원할 지 모르지만 절대로 행복을 낳지 못합니다.
복의 근원 아브라함도 기근을 맞은 때가 있었습니다. 가족(롯)을 구하기 위해 싸워야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의 육신도 나약하고 병든 때가 있었습니다.
형통한 사람 요셉도 부족함을 경험했습니다. 요셉의 삶이 다 그가 원하는 대로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노예로 팔려갈 때에도 그리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그가 ‘형통한 사람’(창 39:2, 23)이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시편 1편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사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많은 과실을 맺고 잎이 마르지 아니함 같이 그 행사가 다 형통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1편은 시편의 제목 같은 장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편 전체를 대표하는 장입니다.
그러나 시편의 내용은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부르짖는 기도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시던 아브라함이 살면서 초자연적인 일을 얼마나 경험했을까요? 요셉은 얼마나 경험했을까요?
100%로 환산한다면 0.1%나 됐을까요? 하지만 요셉이 하나님의 은혜 밖에 머문 적이 있었나요? 없었습니다.
노예로 팔려갈 때도, 감옥에서도, 요셉은 늘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시던 다윗은 살면서 초자연적인 일을 얼마나 경험했을까요?
100%로 환산한다면 0.1%나 됐을까요? 하지만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 밖에 머문 적이 있었나요? 없었습니다.
사울로부터 목숨을 건지기 위하여 미친 척하며 블레셋 땅에 들어갔을 때에도,
세상에서 가장 처량한 사람의 모습으로 아둘람 굴에 숨어 울면서 기도할 때에도 다윗은 늘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 요셉, 다윗은 분명히 형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형통한 정도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 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부족함 없고, 아프지 않고,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져야 얻을 수 있는, 이런 초자연적인 행복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복할 수 있는 가장 유일한 길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곧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일도 초자연적인 것에서 찾으려 합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이메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길 원합니다.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왜 저는 경험하지 못하는 걸까요?”
많은 사람들이 초자연적인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길 기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방법’도 굉장히 자연스럽고 현실적입니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고 신비스러운 육성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길 기대하지만,
예수님은 “너희 안에 계신 성령께서 너희가 행할 바를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요 14:26)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계획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 물론 모든 생각이 다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 마음의 감동이 ‘1.성경 말씀에 근거한 것인지’, ‘2.당연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3.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되는지’의 기준에 반드시 분별해보셔야만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강단에서 선포되어지는 말씀을 들으실 때, 또는 성경을 읽으실 때,
또는 성령 충만한 글을 읽으실 때 ‘마음의 가책’이나 ‘거룩한 의무감’이 있으십니까? 마음의 가책이나 거룩한 의무감이 느껴지신다면 여러분은 정말 복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하여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라는 싸인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은 다 느끼지 않나요?”라고 말씀하시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에 대하여 ‘마음의 가책’ 또는 ‘거룩한 의무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명령에 열심히 순종하며 살아야하는데...’라는 거룩한 의무감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가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거룩한 의무감’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가짜 그리스도인들 즉 예수님을 정말 나의 주(主)로 영접한 사람이 아니라, 천국 가고 복 받는다고 하니까
‘뭐 영접한다고 하지!’라는 마음으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순종에 대하여 마음의 가책과 거룩한 의무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예수님을 영접했다”라고 입술로만 고백하는 것일 뿐, 사실은 예수님을 자기의 주님으로 영접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할 뿐, 사실은 자신들이 주인(主人)이고 예수님은 자기의 욕구(기도)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수고하는 종(從)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명령은 그들의 임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에 대하여 어떠한 가책이나 의무감을 절대로 느끼지 못합니다.
반대로, 순종에 대한 마음의 가책이나 의무감이 있는 사람들은 정말 복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 가책이나 의무감 자체가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 거룩한 가책과 의무감을 잘 발견하고 순종하면,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또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가책’이나 ‘의무감’을 마음속에 지니고만 있을 뿐, 계속 변화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순종에 대한 가책과 의무감이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임을 잘 알고는 있습니다. 또 이 성령의 역사를 꼭 붙잡고 쫓아가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는 있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것도 잘 알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있는 것에서 끝나버리고, 계속해서 변화 없는 삶을 사는 것, 순종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역사하심을 코앞에 두고도 이루지 못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강단에서 선포되어지는 말씀을 듣으실 때나, 성경 또는 성령 충만한 글을 읽으실 때 마음의 가책이나 거룩한 의무감을 느끼신다면,
반드시 그 마음에 순종해 보시길 바랍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을 향하여 어떠한 계획이 있으시기 때문에 여러분 안에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성령님의 계획은 우리가 순종할 때 이루어지게 됩니다. 꼭 성령의 감동에 순종해 보시길 바랍니다.
선교편지를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원주민 J로부터 돈 빌려달라는 문자가 계속 옵니다. 이미 여러 차례 빌려갔는데 갚지는 않습니다.
성령님께 여쭤보니 “그냥 주어라. 너는 더 큰 은혜를 값없이 받았지 않았느냐"라고 말씀하시기에 곧바로 돈을 송금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J로부터 답장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어요! 목사님, 너무 고마워요!” J가 정말로 기도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일이 작게나마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내 뜻대로 되었을 때 일이 꼬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되었을 때 결국 일이 풀린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며,
더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사는 사역자가 되도록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보내는 선교사’가 되시는 여러분들도 그러한 사람들이 되시길 저도 잊지 않고 기도하겠습니다.
케이프 브레튼 섬에서
이근권 목사 드림
이근권 목사는 감리교신학대학과 대학원 졸업,
성육보육원&노인요양원 원목실 담임,
에스카소니 선교, (일산)제자교회를 담임하였고,
현재는 에스카소니 & 폴롯엣 보호구역 원주민들과
케이프브레튼 한인들을 섬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