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23-10-03 조회 수: 72
북미 원주민들은 기독교를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유는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학살과 학대를 당한 가슴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싫어하는 원주민들이 정말 많습니다.
플로렌스는 에스카소니 보호구역 안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몇 안 되는 원주민 중에 한 명입니다.
며칠 전, 플로렌스의 누이가 죽었습니다. 작년에는 플로렌스의 동거인이 폐암과 뇌암으로 죽었습니다.
저에게도 기도를 부탁을 하고, 플로렌스 자신도 기도했지만 그녀의 동거인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몇 달 전에는 남동생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9월 마지막 주에는 여동생이 죽었습니다. 플로렌스가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저 또한 플로렌스의 동거인, 남동생, 그리고 여동생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죽은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쟈니도 예수님을 영접하겠다고 결신했던 원주민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예전에 쟈니가 저에게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정말 들어주십니까?”
제가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쟈니는 자기의 누이가 말기암 환자라고 하며 저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저는 쟈니의 누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쟈니도 누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몇 주 후 쟈니의 누이가 죽었습니다.
쟈니가 저를 찾아와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쳤습니다, “당신은 거짓말쟁이야!”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 후 쟈니는 성경공부 모임에 한 번도 참석하질 않았습니다. 누이를 잃은 쟈니가 하나님마저 잃게 될까봐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몇 주 전에는 저의 사촌 동생이 죽었습니다. 사촌 동생은 태어날 때부터 저와 한 동네에서 살고, 한 교회를 섬기며, 한 식구처럼 자랐습니다.
사실 저의 친형보다 훨씬 더 마음이 가는 동생이었습니다. 그런 동생이 주일날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 잠을 자던 중에 죽었습니다.
저는 그 소식을 전해 듣고 무척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너무 착하고 순수한 동생인데, 그리고 아직도 너무 어린 동생인데, 왜 이렇게 데려가셨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하며 기도하던 중에, 성령께서 저의 마음속에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어떨 것 같으냐? 하나님도 슬퍼하실 것 같으냐?”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안 슬퍼하실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성경을 보던 중, 다음의 말씀이 저의 마음을 불들었습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계 14:13). 이 말씀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제 죽든지, 어떻게 죽든지, 하나님의 눈에 믿는 자들의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복”이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죽음의 문턱을 넘을 때, 우리와 함께 동행해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 힘이 되어주었던 사람도, 사랑하던 사람도, 심지어는 내 가족도 나와 함께 동행해 줄 수 없습니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우리와 함께 동행해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영원한 나라의 주인 되신 분이 우리를 그분의 나라로 인도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사실의 증거를 부활로 보여주신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영원한 예수님의 나라로 인도해 주십니다.
자기의 목숨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분, 내 죄의 댓가를 벌써 치뤄주신 그분이 ‘내가 살아온 삶을 심판하실 심판관’이 되십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그분께서 “네가 치뤄야 할 죗값을 이미 내가 치뤘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라고 말씀하여 주시니,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어느 누구의 죽음보다 더 비참하고 애통하게 죽으신 우리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의 면류관을 쓰신 것처럼,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억울함 속에서 일시적인 죽음의 권세에 엎드린 자들에게도 승리의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겁니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주님이 계시는 곳으로 옮겨가 주와 함께 영원히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한편,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 예수님 없이 홀로 심판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이가 갈리도록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 변론이나 주장도 내세울 수 없는 상태로 중보자도 없이 홀로 의로우신 재판관 앞에 서야만 합니다.
그동안의 죄가 모두 낱낱이 드러나고, 구더기도 죽지 않고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치듯 함을 받는 곳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만 합니다.
가장 끔찍한 사실은 그때 가서는 회개하고 싶어도 회개할 기회조차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뉘우치고 또 뉘우쳐도 영원한 형벌을 그들은 감당해야만 합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는 말씀이 그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농담하시는 분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하신 심판의 경고는 모두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영원한 나라는 ‘영원한 평안과 행복의 나라’가 아니라 ‘영원한 진노와 고통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죽는 우리들은 참으로 복된 사람들입니다. 상
한 마음을 치유하시고 상처 받은 심령을 싸매시는 분, 방탕한 생활을 포기하고 소망 없이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 탕자조차 크게 환영하며 끌어안으시는 분,
마지막 순간에서야 주께 돌아온 십자가의 강도에게조차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하시며 이해할 수 없이 크신 사랑을 베푸신 분,
그분이 우리를 인도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그분의 품 안에서 쉬게 하시고, 온화한 미소를 보이시며, 우리와 함께 노래를 부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 곁은 영원히 지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예수님의 사랑과 천사들의 사랑을 받고, 가는 곳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또 가는 곳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날 겁니다. 이런 예수님의 나라에서 우리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겁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됩니다. 주 안에서 죽는 일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주 안에서 죽는 일은 희망의 끝이 아니라 소망의 시작입니다. 주 안에서 죽는 일은 생명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계 14:13), “그리스도인의 죽음을 여호와께서는 귀중하게 보신다”(시 116:15)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죽음 앞에 슬픔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천국에서 만나기까지 다시 볼 수 없다는 아쉬움’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하나님은 “괜찮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사실은 잠시일 뿐이다. 세상에서의 천년도 영원한 천국에 비하면 그저 순간에 불과할 뿐이다. 장차 천국에서 다시 만나 영원한 행복을 함께 누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많은 원주민들이 함께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원주민들이 예수님의 백성들이 되고, 이해할 수 없이 크고 풍성한 예수님의 은혜를 함께 누리게 되길 기도합니다. 보내시는 선교사가 되시는 여러분들도 함께 기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케이프 브레튼 섬에서
이근권 목사 드림
이근권 목사는 감리교신학대학과 대학원 졸업,
성육보육원&노인요양원 원목실 담임,
에스카소니 선교, (일산)제자교회를 담임하였고,
현재는 에스카소니 & 폴롯엣 보호구역 원주민들과
케이프브레튼 한인들을 섬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