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23-02-03 조회 수: 53
“난 그렇게 안 믿어!”라고 말해도…
올 겨울은 정말 특별한 겨울입니다. 에스카소니에서 자살 소식을 듣질 못했습니다.
매 년 12월 초부터 자살이(자살 시도 소식은 훨씬 많음) 줄줄이 이어져서 지역 신문에 나올 정도인데,
올해는 에스카소니에서 자살 소식을 듣질 못했습니다. 특별히 상황이 예전과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예전과 달라진 상황이라면 많은 분들이 에스카소니를 위해 기도해주셨다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에스카소니에서 자살 소식이 끊긴 이유를 기도해주신 분들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의 기도 때문에 자살의 영이 떠나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자살은 아니었지만, 1월 첫째 주에만 에스카소니에서 3명의 원주민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둘째 주에 또다시 3명의 원주민이 죽었습니다.
원주민 앨랜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2주 동안 에스카소니 안에서 6명이 죽었습니다. 오~ 무섭습니다.” 원주민 지니가 말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조상들이 있는 땅으로 간다고 믿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이땅에 태어나는데,
만일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죽으면 다시 새 아기로 환생한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 믹맥부족의 신앙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지옥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런 끔찍한 곳이 있다고는 믿고 싶지도 않습니다.”
원주민만이 아닙니다. 오래 전 일이지만, 모태신앙이신 어느 분이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제가 무슨 죄를 짓든지 사랑의 하나님께서 다 용서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지옥이라는 끔찍한 곳을 준비해 놓으셨을리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만, 저는 지옥이 없다고 믿습니다. ”
많은 분들이 ‘목회자들은 헌금 설교와 지옥 설교를 너무 좋아해’라고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혹시, 이 선교 편지를 함께 나누시는 분들 중에 ‘우리 목사님은 지옥 설교를 서슴치 않고 하시는데’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그분은 정말 좋은 목사님을 만나신 겁니다. 사실 많은 목회자들이 ‘헌금 설교’와 ‘지옥 설교’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저도 제일 하기 싫은 설교가 ‘헌금 설교’이고, 이보다 더 하기 싫은 설교가 ‘지옥 설교'입니다.
왜냐하면 교인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설교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설교자들이 거룩한 율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반복해서 설교하고,
지옥 불구덩이에 대해 자주 설교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겁만 주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영원히 고통 받는 장소인 지옥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더욱이 많은 사람들이 지옥에 빠질 위험천만한 상태에 놓여 있다면, 그 사실에 대해 경고하는 것이 합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 사람들에게 지옥을 선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지옥에 관한 설교가 담대히 선포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천국에 관한 말씀보다 지옥에 관한 말씀을 더 많이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는 뜻은 ‘우리에게 익숙한 습관과 고집을 버리고, 나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순종하겠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듣기 싫다하더라도 우리의 주님이 하신 말씀이라면 우리는 겸손하게 그리고 마음 깊이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성경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설교하지 말라”고 합니다. 참되신 예수님의 말씀을 얻기 위해서는 나에게 익숙한 것,
그리고 내가 고집하는 것은 겸손히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순전한 복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분의 계획’을 아무리 열심히 전하여도 “난 안 믿어!”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무신론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면 모든 것이 끝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그들이 그렇게 말해도 ‘하나님의 계획과 심판’이 그들을 피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와 똑같은 일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안에서도 발생합니다.
“난 그렇게 안 믿어!”라고 말하고, 자기가 믿고 싶은 데로 믿으면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줄로 아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 또한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믿고 싶은대로 믿는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지옥’입니다. 지옥(심판)에 대한 말씀을 반가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사탄은 지옥에 대한 설교가 선포될 때마다 우리 마음속에 짜증과 화를 가져다줍니다.
사탄은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굳게 걸어 잠그고, 우리가 지옥에 대하여 경계하려는 일을 원천적으로 봉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사탄의 노력이 성공하지 못하도록 지옥에 대한 말씀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라면 축복에 관한 약속만이 아니라 형벌의 대한 경고까지도 귀담아 들어야만 합니다.
지옥을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혼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국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곳이기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을까?’를 기억하는 동시에,
‘지옥이 얼마나 끔찍한 곳이시기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을까?’도 꼭 기억해야만 합니다.
지옥은 어떤 곳일까요?
지옥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복음 중에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지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습니다.
‘구더기도 죽지 않는 곳', ‘형벌의 불이 꺼지지 않는 곳',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는 곳',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혀를 적시는 것이 간절한 소원인 곳', ‘불 못',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는 곳',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는 곳', ‘밤낮 쉼이 없는 곳' 등으로 표현하셨습니다(막 9:48~49, 눅 16:24, 계 20:15, 계 14:10~11).
특히 예수님은 지옥을 설명하시며 ‘게헨나'(gehenna)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게헨나는 ‘힌놈의 골짜기’를 말합니다.
‘지옥’이 ‘게헨나’로 표현된 것은 신약 성경에서만도 열 두 번이 넘습니다.
게헨나는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 있었을 때,
암몬 신 ‘몰랙’(Molech)에게 자기들의 자녀들을 불살라 제사를 드리던 곳이 바로 게헨나(힌놈의 골짜기)입니다(대하 28:1~3, 33:1~6 ; 왕하 23:10).
요시아가 왕이 된 후, 그는 종교 개혁을 일으키고 몰랙 제단을 허물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힌놈의 골짜기’를 부정한 죄수들의 시체, 부정한 짐승들의 사체, 온갖 더러운 오물들을 태워버리는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힌놈의 골짜기에서는 늘 시체 태우는 불이 꺼지지 않았고, 시체를 태우는 연기와 악취도 끊임없이 피어올랐습니다.
그 주변은 늘 구더기와 온갖 벌레들이 우굴거렸습니다.
예수은 지옥을 자주 ‘불’로 표현하셨는데, 그냥 불이 아니라 참으로 더럽고 악취나고 끔찍한 ‘게헨나의 불’로 지옥불을 표현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인간의 제한 된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고통의 표현 중에 불에 대한 고통보다 더 극심한 표현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만일 있다면 어떤 표현이 있을까요? 저는 더 고통스러운 다른 표현이 생각나질 않습니다.
저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극심한 고통의 표현이 바로 ‘불’이라고 생각합니다.
‘꺼지지 않는 불에 영원히 죽지 않고 타는 고통’이 가장 극심한 고통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분신자살을 기도한 사람이 죽지 않고 꺼지지도 않는 불에 계속 불타기만 한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지옥의 고통이 이보다도 훨씬 더 크단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셨나 봅니다.
예수님은 이 지옥의 불을 그냥 ‘불’도 아니고, 더럽고 악취나고 끔찍한 ‘게헨나의 불’로 표현하셨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이 더럽고 끔찍한 불에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막 9:49)라는 말씀도 더하셨습니다.
절대로 지옥이 ‘힌놈의 골짜기’와 똑같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사람들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던 곳을 비유로 드시고, 거기에 강조를 더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지옥의 고통과 끔찍함은 너희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단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지옥에 관한 말씀을 설교하고 난 후, 어느 집사님이 바로 저의 옆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에잇, 아마 지옥은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미워하며 사는 곳일 거야. 서로 미워하며 사는 게 지옥이지 뭐.”
나름대로 열심히 설교를 했는데 참 허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저의 마음속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서운해하지 말아라. 내가 말해도 믿고 싶은데로 믿는단다”
지옥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서 그저 서로 미워하며 사는 곳’이 아닙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말씀은 없습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기 전까지, 완벽하지 못한 세상속에서 완벽하지 못한 인간들과 서로 뒤섞여 살아갑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고난의 때를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겐 고통스러운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때, 가장 마음 아프고 힘들었을 때가 언제였습니까?
숨을 몰아 쉴 정도로 슬피 울었던 때, 정말 더이상 살고 싶지 않았던 때,
‘지금 다시 그 일을 경험한다면?’이라고 생각조차 하기 싫은 때, 그때가 언제였습니까?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지옥은 ‘그때의 고통과 비교할 수 없이 더 고통스러운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뱃속의 아기가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상상조차 할 수 없듯이, 이 세상을 사는 우리는 천국의 아름다움을 상상조차 할 수도 없습니다.
이와 똑같이, 이 세상을 사는 우리는 지옥의 끔찍함도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한 이 세상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창세부터 마지막 날까지 우리를 위하여 준비해 놓으신 천국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일까요?
이와 똑같이, 창세부터 마지막 날까지 준비된 지옥은 얼마나 끔찍한 곳일까요?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 그분의 위대한 능력으로 내리는 진노와 형벌은 얼마나 무서울까요?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그 형벌이 영원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천년이라는 시간이 길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년은 지옥에 비하면 순간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이 영원한 것 같이 지옥도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천년이 지나도 지옥의 고통은 마치 방금 막 시작된 것 같이, 그리고 잠깐의 쉼 없이 계속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면 ‘왜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땅에 오셨는지, 왜 우리를 위하여 모진 십자가의 고통을 감당하셨는지’가 이해됩니다.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그럴 수 있으실까요?
많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끔찍한 지옥의 형벌을 우리에게 내리실 수 있을까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정말 크고 놀랍습니다.
불신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내가 범죄하여도 아무렇지도 않고, 오히려 형통하도다.”
이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시 50:21).
하나님은 당장이라도 이들을 심판하실 수 있으시지만, 우리가 가진 사랑으로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죄인들에게 기회를 주시고 또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없나보다”하며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들의 조롱까지 다 참아내시며 기회를 주고 또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사랑하는 악인들에게 기회를 주시고 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네게 보응하는 날에 네 마음이 견디겠느냐 네 손이 힘이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내가 이루리라”(겔 22:14)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이 돌이키기를 기다리시며 기회를 주고 또 주셨습니다. 그들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셀 수도 없이 많은 기회들을 주셨습니다.
어찌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가 담긴 그 모든 기회들을 다 내던져버리고, 끝까지 하나님을 업신여긴 후에,
“어떻게 하나님이 그러실 수 있어. 하나님은 너무 잔인해”라고 말하는 ‘극도로 이기적인 죄인들’에게 벌대신 상을 주어야만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악한 것을 선하다고 판결하지 않으시고, 부정한 것을 깨끗하다고 판결하지 않으시고, 죄를 죄가 아니라고 판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굽은 판결을 내리시며 악인들에게 벌이 아니라 오히려 상을 베푸신다면 왜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입니까?
“평생 동안 기회를 주었으니, 이제는 더이상 내 위엄과 영광이 짓밟히지 않게 하겠다”라는 하나님의 결정에 무슨 잘못이라도 있습니까?
자신들의 생명의 주(主)를 업신여기던 자들, 자신들의 삶의 주권자께 불순종하던 자들, 만왕의 왕의 약속과 경고와 심판을 무시하던 자들,
만유의 주의 위엄을 죽는 날까지 멸시하던 자들에게 ‘영원한 벌’이 아니라 ‘영원한 상’을 내리셔야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또한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심판이 있다고 경고하시고 선포하셨는데, 그 심판을 이행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이 왜 신실하신 하나님인가?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시시각각 말을 바꾸시는 분이 아닙니다. 선포하신 말씀을 내키는대로 뒤집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약속도 꼭 지키시는 분이시며, 우리에게 선포하신 심판의 말씀도 꼭 지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 속에서 멸시와 천대와 경멸과 조롱을 받으셨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에게 천국의 상을 내려주셔야 해. 그래야 하나님이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정말 악한 영에 완전히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오히려 평생동안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하고, 늦게 회개한 것을 후회하고, 하나님 앞에서 원치 않은 실수를 하는 것에 죄송한 마음만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긍휼이 필요한데, 만일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는 베푸시고 누구에게는 베풀지 않으셨다면 이것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그러나 반대로 긍휼이 필요한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셨는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어느 사람은 그것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것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온 세상을 보십시오. 모든 생명체 안의 질서를 보십시오. 팽이도 누가 돌려야 돌아갑니다.
우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한치의 오차도 없이 공중에 떠서 자전하고 공전하는 지구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계신 증거가 너무나도 명백하지 않습니까? 너무 명백해서 어떤 핑계도 대지 못할 정도입니다(롬 1:20).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다는 말은 우리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들이 모두 사실이라는 뜻입니다.
즉 축복의 말씀들, 심판의 말씀들, 천국과 지옥의 말씀들은 모두 명백한 사실이라는 뜻입니다.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영원한 지옥을 향하여 가고 있는 영혼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으로 원주민들을 바라보길 원합니다.
원주민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으로 원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하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경고를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상과 심판의 말씀을 지혜롭게 잘 전하길 원합니다.
저의 부족함을 성령님께서 도와주시도록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저도 여러분들을 위하여 잊지 않고 기도하겠습니다.
케이프 브레튼 섬에서
이근권 목사 드림
이근권 목사는 감리교신학대학과 대학원 졸업, 성육보육원 담임,
에스카소니 선교, (일산)제자교회를 담임하였고,
현재는 에스카소니 & 폴롯엣 보호구역 원주민들과
케이프브레튼 한인들을 섬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