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23-04-16 조회 수: 69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다시 찾은 마약
3월 마지막 주 화요일에 원주민 S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S는 그림을 잘 그리는 원주민이었습니다. 성품도 온화한 성품이었습니다.
작년에 원주민 C가 갑자기 살해된 채 발견되어진 일이 있었습니다. C에게는 어린 두 자녀가 있었는데, 그 아이들을 S가 거두어 키우고 있었습니다.
S도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란 데로 자연스럽게 마약을 시작했고, 금세 마약에 중독되었습니다.
한 때 마약을 끊기 위해 보호구역을 나와 ‘시드니’라는 시내에 거주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또 육체적으로 만족스러운 삶을 찾아 마약을 하던 옛날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보호구역으로 돌아와 계속해서 마약 주사를 맞았습니다. S가 평소처럼 필로폰을 맞았는지, 아니면 요즘 유행하는 펜타닐을 먹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S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어린 네 명의 자녀를 두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모든 마약이 다 무섭지만, 펜타닐은 정말 무서운 마약입니다. 보호구역 안의 원주민들 70~80%가 알콜과 마약에 중독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보호구역 안에서는 70~80%의 원주민들이 좀비처럼 걸어다닐까?’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화나나 필로폰에 중독되면 계속해서 찾게 되긴 하지만, 마치 알콜중독과 같이 깨어나면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펜타닐은 다른 것 같습니다. 펜타닐은 사람을 좀비처럼 만듭니다. 값싸면서 치명적인 펜타닐이 원주민 마을을 잠식하지 않도록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나태함이 낳는 결과
많은 분들이 ‘원주민들은 마약을 좋아하는구나’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게 좋아하는 거야”라고 표현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약간 원주민들 편에서 말하자면, 많은 원주민들이 좋아서 마약을 하지는 않습니다.
끊지 못해서 마약을 합니다. 마치 담배에 중독된 사람이 담배를 싫어하면서도 담배를 다시 찾듯,
알콜에 중독된 사람이 알콜을 싫어하면서도 알콜을 다시 찾듯, 마약에 중독된 원주민들 대부분도 마약을 끊고 싶어하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마약을 찾습니다.
물론 뇌신경 전달물질의 영향을 받는다고도 하지만, 이들은 ‘허전한 마음’, ‘공허한 마음’, ‘뭔가 비어있는 듯한 마음이 완전히 채워지길 원하는 마음’ 때문에 마약을 찾습니다.
사람마다 크기와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 허전한 마음, 공허한 마음, 채워지지 않은 마음을 달래기 위해 알콜을 찾습니다.
“술자리가 좋은 이유는 사람과의 만남이 좋아서야”라고 말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 ‘채워지지 않은 마음’을 ‘사람과의 만남’으로 채우기 위함입니다.
어떤 이는 이 ‘채워지지 않은 마음’ 때문에 담배를 찾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이 ‘채워지지 않은 마음’ 때문에 마약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채워지지 않은 마음’을 채우기 위하여 술, 담배, 마약, 인기, 돈, 권력, 박장대소할 일 등을 찾지만 공허한 마음은 이것들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 ‘채워지지 않은 마음’은 오직 하나님만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이 공허한 마음은 하나님의 빈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할 때 “공허한 마음은 하나님 빈자리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으로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고 나면 공허한 마음이 영원히 사라질까요?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 감사, 그리고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얼마 후, 공허함은 어김없이 그리스도인들을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지키는 일’에 성실하지 못하여, 그 성실함 대신 나태함이 들어오면 공허한 마음이 다시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나태함은 정말 무섭습니다. 나태함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공백을 만들고,
이 공백은 우리 마음에 공허함을 느끼게 하고, 공허함은 우리를 옛날 생활로 다시 돌아가게 합니다.
감사가 충만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뜨겁게 기도한 후, 곧바로 하나님께 불평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새벽까지 인터넷을 하고 잠들었다가, 오전 11시 즈음에 일어나서
“새벽부터 우리 사랑함으로써 저녁까지 씨를 뿌려봅시다 열매 차차 익어 곡식 거둘때에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하며 뜨겁게 찬양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익숙해지면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안전 불감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안전 불감증은 큰 사고로 이어집니다. 나태함이 들어왔을 때 이것을 방치하면, 나태한 신앙생활이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점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말씀 묵상 시간’이 부담스럽고,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기도 시간’도 부담스러워집니다.
말씀 묵상과 기도보다 당장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더 우선처럼 느껴집니다. 말씀에 감동도 사라지고, 말씀 속의 책망에 짜증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의무는 짐과 고통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키는 일이 지겨워지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반항하기까지 합니다.
“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너무 지겨워”라는 말은 입에 담기도 불경스러운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에서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성실히 지키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이지만, 누구든 이 일에 나태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실한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2)
행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옵니다
지금까지 저는 많은 나라를 여행했습니다. 부자 나라, 가난한 나라, 아름다운 나라, 척박한 나라들을 여행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많은 부류의 교인들을 만났습니다. 돈이 많은 교인, 외모가 수려한 교인, 좋은 직장에 다니는 교인, 고된 일을 하는 교인 등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이렇게 풍요로운 환경에서 사셔서 행복하시겠어요?”
그때마다 이런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죠.”
좋은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환경에서 사셔서 행복하시겠어요?”
이때에도 동일한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죠.”
부유한 나라에서나 가난한 나라에서나 그리고 부유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사람들로부터 공통적으로 듣게 되는 대답이 또 있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행복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늘 감사합니다.”
물론 천국을 모르고 ‘세상의 재미’와 ‘거짓 만족’에 빠져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참된 행복은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어떤 환경에서 사느냐가 아니라 무슨 삶을 사느냐에 따라 행복하게 되는구나’
저는 말씀 묵상 생활과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하나님과 관계가 바르지 못한 사람을 보질 못했습니다.
저는 말씀 묵상 생활과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을 한 명도 보질 못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었고, 하나님의 보호 안에 있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 안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늘 하나님의 은혜를 끊임없이 경험하고, 늘 감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열심히 전해야 하겠지만, 저또한 성실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켜나아가길 소망합니다.
이를 위해서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저또한 ‘보내는 선교사'가 되시는 여러분들을 위해 잊지 않고 기도하겠습니다.
케이프 브레튼 섬에서
이근권 목사 드림
이근권 목사는 감리교신학대학과 대학원 졸업,
성육보육원&노인요양원 원목실 담임,
에스카소니 선교, (일산)제자교회를 담임하였고,
현재는 에스카소니 & 폴롯엣 보호구역 원주민들과
케이프브레튼 한인들을 섬기고 있습니다.